자유게시판
크리스마스카드는 젊은 날 연인사이에 주고받는 애틋한 마음이고, 연하장은 세상물정 아는 사내들이 주고받는 우정이 라는 것이 나의 견해(見解)다. 謹賀新年이나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나 송구영신(送舊迎新)의 덕담이기는 마찬가지인데 내게는 그리 느껴진다.
크리스마스카드 한 장을 주고 받아보지 못한 나의 젊은 날은 너무 가난해서 섣달그믐쯤 노을진 빈 들녘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혼자 서있는 것처럼 처연(悽然)하다. 그래서 그런지 내게 크리스마스카드는 낯선데 비해서, 연하장은 입던 옷 같이 친숙하고, 간혹 잔잔한 추억도 한둘쯤은 깃들어 있다. 그중 장래가 불확실한 젊은 날 정섭이와 주고 밭은 눈(雪)물인지 눈(眼)물인지에 젖은 연하우편엽서로 된 연하장이다.
고교를 졸업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던 해 겨울, 함박눈이 쏟아지는 어느 날이었다. 우체부가 눈에 쫓기듯 사랑 뜰 위로 올라와서 귀까지 덮는 털모자를 벗어서 툭탁툭탁 눈을 털고 내년 보리풍년은 따 놓은 당상(堂上)라며 마실꾼처럼 방으로 들어왔다.
마침 점심상을 물린 뒤였고 아버지도 사랑방에 계셨다. 아버지가 안채에 대고 찬밥이라도 있으면 볶아 내오라고 소리를 치셨다. 어머니가 옹솥에다 김치를 썰어 넣고 식은 조밥을 들기름에 볶아서 내오셨다. 방금 아버지와 나도 그렇게 볶은 밥을 먹고 난 후였다. 우체부는 밥을 먹고 나서 눈이 더 쌓이기 전에 가야한다며 돌리지 못한 동네 우편물을 밤에 마실꾼들이 오거든 돌려달라며 떠넘기고 갔다.
그 우편물 속에 정섭이의 연하우편엽서가 있었다. 그 게 내가 처음 받아본 연하장이다. 우표가 인쇄된 앞면은 방문에 발갛게 등잔불을 밝혀 놓은 산골 초가집 몇 채가 모여 앉아서 주먹 같은 함박눈에 파묻히는 전형적인 연하장 그림이 오프셋 인쇄되어 있고, 뒷면에는 사연이 깨알 같이 배겨있었다.
그 사연을 지금 다 기억할 수는 없다. 눈이 와서 네 생각하며 걷다보니 면소재지까지 오게 되어 우체국에 들려 이 우편엽서를 쓴다는 요지의 서두와 그 해 농사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격앙된 감정을 들어내고, 그래도 우리는 젊으니까 좌절하지 말자는 뜨거운 마음을 피력했던 것 같다. 두어 군데 잉크가 물에 번진 자국이 있었다. 눈(雪)에 젖은 자국인지 모르지만, 나는 그 게 정섭의 눈물 자국 같아서 그가 사는 월악산 산골짜기로 달려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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